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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은지가 두 마리의 레버넌트를 손에 넣고 트론돌에 돌아온 뒤로, 난 이 아크네시아에 두 번째로 끌려온 뒤 유래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은지에게 힘을 갖게 하려는 것도, 내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모두 그 성교회라는 초유의 상대를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성교회의 사도란 녀석들이 망령들을 이용해 트론돌 시민들을 학살하려고 했던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리고 녀석들을 사로잡아, 고문하고, 죽여버린 일도 예정에 없던 일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이 성교회 녀석들과는 여러모로 얽힐 것이 분명했다.
세 명이나 되는 사도를 잃은 성교회 측에서 이대로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 사도들을 살해한 것은 거대한 드래곤이었고, 트론돌과 그 드래곤 사이의 관련성 따위는 전혀 없다.
하지만 녀석들이 계속해서 그 정체 모를 드래곤만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녀석들의 목표는 이 트론돌 시 혹은 나였다.
언제고 녀석들은 트론돌을 다시 노릴 것이다.
아니면 나를 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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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싸워야 할 적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보망을 가동해야 했다.
하지만 거대한 세력을 가진 집단치고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성교회의 세력 구도는 어떻게 되는지, 신성 교회에 살고 있는 신도들은 얼마나 되는지, 심지어 도대체 성교회의 수장이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돈을 물 쓰듯이 여기저기 뿌려가며 간신히 알아낸 것은 성교회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몇 개 상회에 대한 정보였다.
신성 도시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다양한 종류의 물자를 소비해야 했고, 또 그 양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신성 도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인과의 교류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하는 물품을 결코 공개 입찰 따위로 조달하지 않았다.
믿을 수 있고, 대량의 산물을 차질없이 납기할 수 있는 대형 상회 몇 곳에서만 정기적으로 공급받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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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난 직접 움직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피린 마탑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내게 코를 꿰여 빚쟁이로 전락했던 다섯 개의 상단은 그동안 내게 공급받은 대량의 오레이칼코스를 아크네시아 전역에 팔아 각기 일억 골드가 넘는 큰 이득을 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내게 받아서 팔아야 할 오레이칼코스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은 몇몇 상인들에게 소개시켜달라는 작은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일반인들은 몰라도 조금이라도 규모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상인들은 전부 내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내 이름은 그 자체로 거대 상회의 주인들의 비밀스러운 사랑체로 인도하는 입장권에 다름 없었다.
난 아크네시아에 이름난 상회들을 하나씩 방문해서, 그들과 인연을 맺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사업가라해도, 이제 막 아크네시아에 몰려오고 있는 난민 출신의 젊은 재신(財神)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로말로 자작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자작님의 명성이 요즘 이 아크네시아 곳곳에 울려퍼지는 듯 하더군요.
동대륙 제일의 거부이신 키스 남작께서도 자작님께는 한 수 양보를 하신다고요.”
대륙 북부 제일의 곡창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카나노스 왕국의 수도에 위치한 한 화려한 저택의 주인인 학자풍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냈다.
상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온화한 인상의 노인은 대문까지 나와 날 영접하고, 왕궁의 홀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로 기꺼이 안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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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카나노스 제일가는 명가의 벨테브레이 가문의 가주를 만나뵙게 되서 큰 영광입니다.”
의례히 그렇듯 우리의 대화는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바르는 번지르르한 인사로 시작되었다.
“저희 상회와 같이 공동으로 사업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윽한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차를 곁들인 격조 높은 담소가 오간뒤 노인은 내 방문의 목적에 대해 궁금해 했다.
“예. 벨테브레이 가문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상품이 조금 있습니다.”
난 마법 창고에서 그에게 보여줄 상품 몇 개를 꺼내 놓았다.
“이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귀걸이 등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언뜻 탐욕이 스쳐지나갔다.
“꽤 질 좋은 진주들이군요.”

아무리 인자해 보여도 상인은 상인이다.
노인은 테이블 위에 놓인 목걸이를 들어올려 천장에 달린 수십 개의 라이트닝 아티팩트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유백색의 진주들이 은은하면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군요. 이렇게 멋진 진주들을 아낌 없이 사용한 목걸이라니, 호화롭다기 보다는 미친 짓 같다는 생각 마져 듭니다.”
노인은 직경 8mm짜리 진주가 무려 백 팔십 개나 사용된 목걸이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감탄사를 내 뱉었다.
아크네시아에서 진주란 보석은 보통 한두 개 정도를 다른 보석들 중앙에 끼어 넣는 정도로 쓰일 뿐 이렇게 백 개도 넘는 진주를 한 줄로 꿰어 목걸이나 팔찌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진주는 바다 깊은 곳의 조개에서 캐는 것으로, 바다에도 흉폭한 몬스터가 가득한 아크네시아에서 진주 조개를 캐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조개를 대량으로 양식해서 양식 진주를 만드는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만 오천 골드, 아니. 이렇게 균일한 크기의 진주를 이정도나 모으려면 육만 골드도 아깝지 않겠군요.”


노인는 손에 들린 목걸이의 가치를 책정했다.
만약 그 귀한 목걸이가 도매 시장에서 삼만 원 정도면 충분히 사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이 노인이 알았다면 기절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멋진 보석을 목에 걸고 다니려면 도대체 어떤 제국의 황녀님이나 가능할련지 모르겠군요.
이 팔찌는 오천 골드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겠군요.”
도매 가격 이천오백 원, 백화점에서 사도 이만 원이면 살 수 있는 평범한 진주 팔찌를 노인은 세상에 둘도 없는 귀물 취급을 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지구인들이 아크네시아에 올 때, 이런 저런 귀금속이나 보석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크네시아의 보석 가격도 전에 비해서 많이 내려갔지요.
하지만 지금 보여주신 물건들처럼 질 좋고, 보관 상태가 좋은 물건들은 드물 겁니다.”
노인은 순순히 내가 내 놓은 물건들의 가치를 인정했다.
진주는 다른 보석들과는 달리, 수명이 유한한 보석이다.

착용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상처가 생기고, 주의를 한다고 해도 길어야 십 년 정도면 광택이 없어지고 심한 경우에는 껍질이 벗겨지기도 한다.
때문에 진주는 보관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손이 많이가는 보석이다.
하지만 양식 진주의 보급으로 더이상 보석 취급을 받지 못하는 지구에서 진주의 보관에 신경쓰는 사람은 더이상 없다.
꽤 많은 지구인들이 이런 양식 진주 장신구를 지닌채 이곳에 도착해서 현지인들에게 팔아넘기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정작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진주는 시장의 가격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공급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상회와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상등품의 진주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해도 사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특히나 진주 같은 고가의 상품은 귀족이나 적어도 한지역의 내노라하는 유지 가문이 아니면 어디 넘볼 생각이나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요.”
내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한 물건이란 것은 팔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인 법이다.
“벨테브레이 가문은 삼백 년 이상이나 이 카나노스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명가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카나노스에 진주를 공급하려 한다면 벨테브레이 가문만큼 적당한 곳은 또 없을 겁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카나노스에 진주를 공급하신다는 말은, 우리 벨테브레이 가문에게 카나노스에서 팔 진주만을 공급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살짝 눈썹 끝이 올라가는 모습으로 보아 만족하지 못하는 듯 했다.
“벨테브레이 가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이 카나노스에 공급하려는 진주만 해도 결코 적은 양은 아닐 텐데…”

나는 마치 굳이 당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일부러 말 끝을 흐렸다.
“얼마나 많은 양을 가지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벨테브레이 가문에서 전부 구매할 의향이 있습니다.”
상인에게 자존심은 오직 돈 뿐인 법.
네가 가진 돈으로는 다 못산다는 말을 하자 노인이 조금 울컥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진주의 시장 가격이 대략 이백 골드 정도 하지요?”
난 귀걸이에 달린 9mm짜리 진주를 가르키며 물어보았다.
“그렇게 질이 좋은 놈이라면 충분히 이백 골드는 받을 수 있지요.
우리 벨테브레이 가문의 문장이 찍힌 보증서와 함께하면 한 쌍에 사백 오십 골드도 가능할 겁니다.”
“귀걸이만 오만 쌍 정도 공급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크기는 제가 보유한 물건 중에는 가장 작은 크기로 보시면 되고요.
목걸이는 이천 개, 팔찌는 팔천 개 정도, 그리고 이걸 한 번 보시지요.”
난 13mm짜리 큼지막한 흑색의 진주가 박혀있는 반지를 꺼냈다.
“훌륭하군요.”
흑진주는 같은 크기의 백진주에 비해 산출량이 월등히 적어, 적어도 다섯 배, 때로는 열 배 이상도 받을 수 있다.
“이런 반지도 오백 개, 백진주는 오천 개 정도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흐음… 공급가를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하 일억 골드는 되겠군요.
확실히 우리 가문의 재력으로 전부 구매할 수는 없겠습니다.”
잠시 자존심이 상한 노인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하지만 곧 그는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많은 양의 진주가 일시에 풀리면 진주의 값은 적어도 10%는 떨어질 것이오.”

“이 대륙 북부에 이런 상품을 원할만한 귀족과 상류층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하기는 북부 대륙에만 적어도 백만 이상은 되겠지요.
처음에야 약간의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곧 회복할 수 있을 테죠.”
노인은 순순히 내 의견에 동조해주었다.
노회한 상인인 그가 이 거래의 갑인 내게 굳이 논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
논쟁을 잘 하는 것은 결코 상인의 덕망 중 하나가 아니다.
말싸움에 이겨서 얻는 것은 상대의 원한 뿐, 그보다 상인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를 맺고, 위기를 포착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상품이 일제히 풀린다면 가격이 순식간에 붕괴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가격을 유지하면서 물건을 팔려면 아무래도 상품을 공급하는 자가 한 명인 것이 가장 좋겠죠.”
상대방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기술을 익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벨테브레이 가주께서는 독점적인 권한을 원하시는 군요?”
그건 질문이 아니다.
상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상황. 독점.
성공한 상인이 되려면 반드시 어떤 상품이라도 독점해서 팔아야 한다.
동일한 상품을 다른 누군가와 경쟁해서 판매한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상인이다.
진정한 상인이라면 판매가 시작 되기 전에, 경쟁자를 제거하고, 상품을 독점하는데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한 번 그런 독점 공급자가 되면 시장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스탠더드 오일이 그랬고, AT&T가 그랬고, 마이크로 소프트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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