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게임
35——————-“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무얼 위해서 네메아를 위해 싸워준다는 말인가요?
네메아에는 아무 것도 없지 않아요?”
황녀는 핵심을 짚었다.
그 어떤 나라도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전쟁에 끼어들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이 네메아에 관심을 가질 것이 뭐가 있나요? 우리들이 쓰는 돈은 모두 당신에게서 나온 건데?”
“있습니다. 아주 대단한 것이.”
“그게 뭔가요?”
“초대 황제의 유산이요.”
“설마?”
“예. 아무도 찾지 못한 초대 황제의 무덤, 그 안에 산처럼 쌓여 있다는 황금과 보석들, 그리고 성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설에 불과하잖아요?”
“그렇죠. 전설이죠. 하지만 전설에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힘이 있답니다.”
“성검이라니. 그런 것이 있다면…”
황자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남자들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초대 황제가 나라를 건국할 때 사용했다는 성검은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위대한 무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네메아 주변 열두 나라의 봉신들은 성검의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
만일 다시 세상에 성검이 나타난다면 네메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
천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열두 나라의 국왕들이 성검의 주인에게 복종하지는 않겠지만, 그걸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천 년 동안의 혼인으로 열두 나라의 왕가와 황제의 가문은 서로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두 나라의 누구라도 황제의 후손이기도 하다는 의미이고, 다른 말로 하면 누구라도 황제를 계승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그런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네메아의 황제 자리가 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성검이 등장하면 상황은 바뀐다.
성검의 주인은 명분을 갖게 된다.
문제는 그 초대 황제의 무덤이 어디 있는 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 아레오폴리스에서는 재상이 초대 황제의 무덤을 찾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시해한 것도 사실 그 이유였다는 말들을 하고 있지요.”
소문을 퍼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암살로 아레오폴리스는 술렁이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물론 황제의 암살의 원인이야 누구 봐도 뻔할 정도로 단순한 권력 참탈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고대의 전설과 엄청난 재화에 얽힌 이야기를 선호했다.
황태자가 빈번하게 궁 밖을 나가곤 하던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런데 황태자가 단순히 일반 백성들의 삶에 대해 궁금해서 궁 밖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 보다는, 고대의 무덤을 찾아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 쪽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
최근 황태자는 초대 황제의 무덤을 발견했고, 그 엄청난 비보를 노린 재상이 손을 써서 황제와 황태자를 죽이고 그 많은 재화와 전설의 무기를 손에 넣고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 한다.
술집에서 주정뱅이가 중얼거린 그 이야기들은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이야기들은 아레오폴리스의 사람들 사이에서 돌면서 살을 붙여갔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내가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버려 심지어 나조차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신빙성 있는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재상은 그렇게 떠도는 소문을 단속하기 위해 속을 썩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사 아주 뜬금 없는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 아레오폴리스 외각에서 발견된 옛 유적 한 곳이 삼엄한 경비 속에 발굴 중에 있다.
이미 한 해 전부터 재상이 심혈을 기울여 그곳의 탐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직 그곳이 초대 황제의 유적이 맞는 지 모르지만 재상은 큰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 부터 약 삼 년 쯤 지난 뒤에 그곳은 발굴이 완료되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초대 황제의 무덤은 아니다.
나중에 발굴이 완료되고 나서 초대 황제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는 삼대 황제의 무덤으로 밝혀져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큰 이슈가 되었지만, 새로운 황제에게는 몇 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삼대 황제의 무덤에도 황금이나 보석은 있었지만, 몇 년이나 투자해서 발굴한 값어치를 하지는 못한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어 줄 거란 말이에요?”
“이미 소문은 그리 퍼져 있습니다.
이제부터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돈을 물쓰듯 쓰시면 소문은 더욱 신빙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두 분 전하께서 쓰시는 돈과 초대 황제의 무덤을 연관시키는 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대단한 보물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네메아가 아니라 우리를 노릴 거 아닌가요?”
“네메아에는 훨씬 더 많은 보물이 있다고 생각하겠죠.”
어차피 억측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의심의 방향은 결국 네메아의 새로운 황제에게로 옮겨질 것이다.
“하지만 네메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다른 나라들이 끼어들면 결국 네메아는 다른 나라에 빼앗기게 되는 거 아닌가요?”
다시 황녀가 물어보았다.
그녀는 동생보다 훨씬 더 현명했고,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그 사실은 더욱 뚜렸해 진다.
어지간한 어른들 보다 훨씬 더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할 줄 알고 있었다.
“국제 정세란 것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네메아를 둘러싼 어느 나라도 한 나라에서 네메아를 차지하도록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만드는 것이 외교입니다.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 두 분 께서 이곳 필리아트라에서 머무시는 동안 하셔야 할 일이 그런 것입니다.
두 분은 피신을 오신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힘의 관계를 잘 이용해서 네메아를 다시 되찾는 것 뿐 아니라 앞으로 네메아가 열두 나라 위에 우뚝 설 수 있게 만드셔야 합니다.”
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떠먹여 주겠다라는 말보다는 두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말이 좀 더 와 닿을 것이다.
멋진 옷을 입은 황자와 황녀와 함께 다시 궁으로 들어가 국왕과 왕비를 알현했다.
두 사람은 제대로 꾸민 두 아이를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국왕에게 스코펠로스에 저택을 마련한 사실을 알리고, 황자와 황녀가 그곳에서 머물겠다고 청했다.
“아무래도 왕궁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황자님과 황녀님께서 궁에 머무르고 계시면 자꾸 불의의 사고를 당하신 태자 전하와 황제 폐하의 생각이 나셔서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신 듯 합니다.
또 이번에 아르테네스의 명망 높은 헌터이자 밀리언인 로즈마리 양이 황자님과 황녀님을 보살펴 주시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리 그 간악한 자가 또 다시 몹쓸 짓을 시도한다 해도 밀리언이 지키고 있다면 그리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래. 궁안에 있어서 마음이 그리도 불편하다면 그리 해야지.
그래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사람을 보내 저택을 경비토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저택 경비를 위해 몇 명 쯤은 고용할 생각이었는데 걱정을 덜게 되었다.
아무래도 사병을 쓰는 것보다는 왕의 호위 무사 들이라면 훨씬 더 믿음이 간다.
“그리고 전하. 이것은 두 분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이렇게 이곳 필리아트라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입니다.”
황녀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역시 커다란 보석이 달린 목걸이 한 개와 왕홀(王笏) 한 자루를 바쳤다.
60센티미터 가량 되는 금으로 장식된 지팡이의 끝에는 커다란 붉은 루비가 박혀 있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보물이 아니란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힘들게 타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손자들에게 이런 귀한 것 까지 받다니 가당치도 않도다.”
누이의 손자에서 손자들로 호칭이 조금 바뀌었다.
선물은 언제나 고마운 것이다.
체면상 한두번 거절하던 국왕과 왕비는 황자와 황녀의 간청에 선물을 받아들였다.
각기 100만 골드는 충분히 나갈 귀물들이다.
이제 두 사람은 황자와 황녀가 이곳 필리아트라에 머무는 동안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새로운 저택에 거처를 마련 하고 이틀 뒤 안드라비다에서 사람이 왔다.
남자는 안드라비다 외무국의 부국장을 맡고 있다는 자작이었다.
일부러 황자와 황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고, 나만이 그자를 맞이했다.
몇 번 그자는 직접 두 아이를 보고 싶다고 청했지만, 난 단칼에 거절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당분간 외부인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두 분 전하께서 의젓하시기는 하지만 아직 성인도 되시지 않은 나이이십니다.
신하된 자로서 두 분 전하의 심기를 어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일 아직 안드라비다에 있었다면 이렇게 배짱을 부릴 수는 없었겠지만, 이미 우리는 안드라비다 국왕의 손을 떠나 있다.
욕심 많은 자를 상대할 때는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안 된다.
상대의 욕망을 자극하고, 원하는 줄 것 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족하다.
한 번 욕망을 만족시켜주면 상대는 끝도 없이 다음을 원한다.
그러기에 안드라비다 국왕과의 거래를 위해서는 이렇게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실종 되신 뒤 국왕전하께서 무척이나 놀라셨습니다.
두 분께서 이 필리아트라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실 때 까지 전하께서는 식사도 못하시고 노심초사 두 분의 안위만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름 격에 맞는 작위를 가진 사람을 보내고, 또 이렇게 간절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안드라비다 국왕이 황자와 황녀가 도망간 것을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는 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완전히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놓쳐버렸으니 꽤나 원통할 것이다.
못해도 100만 골드, 잘만 하면 수백만 골드를 네메아의 새로운 황제에게 울궈낼 수 있는 좋은 패였다.
거기다가 지금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황자의 값어치는 몇 곱절은 높아진다.
네메아 초대 황제의 숨겨진 유산이라면 몇 천만,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보물들이 틀림없다.
네메아를 점령하고 황자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워서 그걸 빼앗아도 좋고, 아니면 황자를 미끼로 신 황제와 반분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안드라비다 국왕의 얼굴은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식사를 못하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내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잠시 동안 황자와 황녀를 안드라비다에 머물게 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국왕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군요. 빨리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 미처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셔서 저의 사죄를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왕 전하께서는 두 분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하루속히 안드라비다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드라비다에서 그런 습격을 받은 뒤로 두 분 전하께서는 사실 꽤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저택을 떠나기 어려울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저택에 머무시는 것 보다는 안드라비다 왕궁이 훨씬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두 분 전하의 안위를 위해 아르테네스의 명망 높은 헌터이자 밀리언인 로즈마리 양을 두 분의 호위로 고용했습니다.
어지간한 호위보다는 훨씬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밀리언이라고요?”
밀리언이라는 말에 자작의 눈이 흔들렸다.
기왕 비싼 돈을 주고 고용했으니 실컷 홍보에 활용해야 했다.
밀리언은 몇 푼의 돈 따위로는 절대 고용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일국의 국왕이라고 해도 밀리언을 호위로 삼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다.
